1904 ‘갑진왜란’
역사에서 사라진 ‘갑진왜란’
41년 최장기 항전의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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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4>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의 역사는 다섯 단계로 나뉜다. 창건-혼란-안정-위기-국민전쟁 시기로 세분해 볼 수 있다.
제1기 창건기는 1898년 3~7월께 독립협회의 변란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포괄한다.
갑오왜란(1894. 7. 23) 이후 경복궁 내 포로 상태였던 고종이 아관망명(1896. 2. 11)을 통해 극적으로 왕권을 회복하여 칭제건원운동을 거쳐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대외적으로 승인을 받았던 시기다.
제2기 혼란기는 독립신문·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반러·친일 변란으로 대한제국의 존립이 도전받고 왕권이 탈취당할 뻔한 시기다.
1898년 3~7월부터 12월까지 최장 10개월의 기간이다.
제3기 안정기는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친일 변란을 진압한 1899년 초부터 1903년 12월까지 5년간이다.
3만 명 규모의 신식 군대 육성, 전차·철도·전신·전화 등 교통·통신 체계의 완비, 근대적 회사 설립 장려 정책 등 ‘광무개혁’이 이때 본격 추진됐다.
제4기는 국가 위기로, 일제가 1904년(갑진년) 2월 6일 재침해 한반도 전역을 군사적으로 다시 점령한 시기다.
이는 ‘갑진재란’ 또는 ‘갑진왜란’으로 불려야 마땅함에도 우리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1894년의 갑오왜란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똑같은 일이 10년 만에 다시 반복됐다.
1894년의 갑오왜란·청일전쟁, 1904년의 갑진왜란·러일전쟁의 발발은 쌍둥이처럼 그 구조가 닮았다.
둘 다 한국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일제에 의해 기획되고 은폐된 전쟁이다.
조선은 갑오왜란으로 멸망했고, 대한제국은 갑진왜란으로 멸망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 두 차례의 왜란을 복원해야 대한제국이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극악한 ‘군사 정복’으로 멸망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7~27쪽).
갑진왜란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관통하는 장기 전쟁을 거쳐 1945년 종결됐다.
우리 민족은 고려 삼별초의 37년간 ‘항몽(抗蒙) 전쟁’보다 더 긴 41년 장기 항전을 전개했다.
갑오왜란부터 치면 51년간 하루도 쉴 새 없이 싸운 항일전쟁이다(최덕규 해제,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85쪽).
일본 군사사(軍事史) 전문가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는 갑진왜란을 ‘조선병합전쟁’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으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병합은 격심한 민족적 저항에 직면해 4년에 걸친 군사행동을 수반하게 되었다.
평화적으로 합병이 이뤄졌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이 식민지전쟁은 비밀에 부쳐져 그 군사작전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도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식민지화를 위한 전쟁이었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日本軍事史)』 163쪽)
후지와라는 일본인일지라도 ‘한국병합전쟁’ 또는 ‘식민지전쟁’으로 규정하며 갑진왜란의 실상을 갈파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일제가 꾸며낸 ‘평화합방의 모양새’에 속아 이 갑진왜란의 존재를 역사책에서는 물론 의식에서조차 지워버린 상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0~31쪽).
러일전쟁도 갑진왜란 연장선에서 파악
일제는 갑진왜란 이틀 후인 2월 8일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는데, 이 러일전쟁도 이제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파악돼야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전시(戰時) 중립’을 선언한 상태에서 기습 침략을 감행한 사실도 놓쳐선 안 된다.
당초 고종은 영구중립화를 추진했다.
1900년 8월 조병식을 일본 공사로 보내 대한제국의 영구중립화를 타진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0. 8. 20).
러시아는 고종의 이 중립국안을 지지하고 1901년 7월 한반도에서 일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러·미·일 공동 보호하의 영구중립으로 만드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9. 20).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점유하려는 일제는 중립국안을 거부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10. 10).
고종은 1903년 8월까지 영구중립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까닭에 러일전쟁은 한국의 영구중립화를 추구하는 한국·러시아와 이를 반대하는 일본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47쪽).
러일전쟁의 소문이 매일 떠돌던 1903년 중반을 넘기면서 고종은 방침을 수정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전시 중립 선언’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로선 최선의 방안이었다.
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내심 고종은 러시아가 이기길 바랐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래야 했고, 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러시아가 ‘전시 중립’이란 말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1903년 8월 15일자로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러 우호와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러 연합항전을 제안했다(홍웅호 편역, 『러시아문서 번역집(Ⅳ)』 62~63쪽, ‘대한제국 황제가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서신’).
러시아군이 고종의 기대대로 대한제국의 영토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면, 고종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규군과 비정규군(의병)을 총동원해 러시아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만주와 여순 안에 진을 친 채 전쟁을 소극적으로 풀어 갔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한제국의 군사 역량을 보존해야만 했다.
러시아가 패한다면, 고종과 대한제국은 청국과 러시아를 차례로 이긴 일본군과 홀로 사생결단의 항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됐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2쪽).
고종의 전시 중립 선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적개심을 증폭시켜 항일 투쟁력을 배가시켰다.
소위 아세아주의(동양주의 혹은 동양평화론)에 속아 일본에 우호적인 한국인들까지도 중립 선언을 침해한 일본군의 무차별 한국 점령에 대해 공분하기 시작했다.
또 러시아에는 실익을, 일제에는 큰 손실을 입혔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 협상에 국제법적 구속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때 패전국 러시아가 이례적으로 전쟁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은 일본이 중립 선언 상태의 대한제국을 침입한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력은 1904년 당시 세계 4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일제의 군사력은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국군 총 병력 3만여 명은 중립국을 유지하는 병력으로는 작은 숫자가 아니며 더욱이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으로 일제에 연합항전을 전개하는 데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는 1904년 4월 14일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불을 질러 고종의 분시(焚弑)까지 기도했다.
경운궁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탈 정도의 대화재였다.
다행히 고종은 황실도서관으로 쓰던 수옥헌(현재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이 화재가 방화임을 알았지만 철저히 모르는 체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가 눈치챈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확히 일제의 방화임을 알린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44쪽).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는 이 같은 사실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왜변’이라 명명해야 하듯이 일제의 고종 분시 기도 역시 ‘갑진왜변’으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 국군이 본격 대일 항전에 나선 것은 을사늑약(1905. 11. 17) 이후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하는 가운데 최대한 경거망동을 자제시키며 보존해 온 국군과 민군을 총동원하여 ‘국군·민군’ 일체의 전면 항쟁, 즉 국민전쟁을 개시한다(한용원,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 90~91쪽).
1905년 12월부터 고종은 거의밀지를 전국적으로 다시 하달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도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어났다.
고종을 정점으로 국군과 민군이 독립을 위해 하나의 의군으로 합쳐진 ‘국민군’은 ‘대한독립의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운궁은 국내외 항일 독립전쟁의 지휘소였다.
갑진왜란을 빼놓은 기존의 역사책들은 갑진왜란에 대항에 전개한 처절했던 국민전쟁을 소위 ‘구한말 의병 투쟁’이라며 축소해 놓았다.
일본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4년간 국민군이 치른 전투는 총 2852회, 국민군의 병력은 총 14만1815명에 달한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 164쪽).
그때까지 국민군 전사자는 일제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더라도 무려 1만7840명에 달했다(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167쪽, 표3-7).
국민군은 전국적 항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일제의 강제 병탄을 계속 지연시켰다.
일제 통감부는 한때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아야 하는 궁지로 내몰렸고, 그런 책임을 묻는 비난에 밀려 이토는 통감직에서 해임됐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에 대한 ‘폭로 전쟁’도 병행했다.
고종이 1904년 극비리에 영국인 기자 출신 베델을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항일 폭로·홍보 전쟁을 벌였던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실무를 맡은 인물이 고종의 신뢰를 받던 궁내부 예식원 회계과장 백시용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까지 반일 의병전쟁의 피어린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국내외에 알렸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211~213쪽).
미·일 갈등, 러·일 접근 속 이토 처단 밀명
고종이 1907년의 헤이그회의, 즉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 6. 15~10. 18)에 황제의 특사단을 파견해 을사조약이 늑약임을 폭로한 외교전은 비교적 알려져 있다.
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유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다.
그러나 한국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고종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다.
고종은 여전히 밀명을 내리고 의군을 조직하며 국민전쟁을 지휘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라는 고종의 밀명이 대한독립의군 총장 이범윤을 통해 당대 최고의 명사수이자 충군애국심의 신(新)존왕주의에 투철한 안중근에게 내려갔던 것이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42~399쪽).
1906년부터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이전과 정반대로 뒤집혔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한국을 배신하고 일제를 지지했던 미국이 일본과 갈등에 빠지며 전쟁을 벌이려고까지 했고, 그러자 러시아와 일본이 접근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일 갈등이 심화될수록 일제는 러시아로 기울었고, 러일전쟁 패전과 1905년 이래 사회주의 혁명 열기로 인해 국내적으로 약화된 러시아가 일본의 접근을 받아들이면서 러·일 접근이 가시화되었다.
고종은 대책을 찾기 어려운 이 모순된 국제 정세의 흐름과 고투를 벌였다.
미·일 갈등은 한국의 독립 회복에 이로운 정세를 조성해 주지만, 제2차 러·일협약을 위한 러·일 접근은 일제에 한국 병탄의 길을 열어줄 공산이 큰 점에서 대한제국의 존속에 매우 해로운 정세 흐름이었다.
급속한 러·일 접근 추세에 고종이 내놓은 대응책 중 하나는 일본 내 러·일 협상파의 우두머리 이토를 러시아령 안에서 처단함으로써 러·일 외교 관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이와 연관된 거사였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37~342쪽).
고종 폐위 직후 일제는 한국군 해산까지 밀어붙였다.
대한제국 국군과 민군의 연합 항전인 국민전쟁은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일제히 본격화되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혈전을 전개했다.
고종이 만든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감시를 의식하면서도 가능한 한 그 전쟁 일지를 기록해 놓으려고 했다.
전국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지방을 거의 ‘해방구’로 만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탄약과 무기의 부족으로 점차 북상해 만주와 연해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런 까닭에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자신이 초안하고 1940년 9월 17일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공동 명의로 발표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에서 대한제국군의 강제 해산과 동시에 시작된 대한국군의 서울 전투 개전일인 1907년 8월 1일을 광복군의 창립일로 선언했던 것이다.
“국방군과 의병이 서로 힘을 합쳐 가는 곳마다 적을 휩쓸어 버리니 그 명성과 위세가 큰 파도처럼 호호탕탕했다.…
요컨대 한국 광복군은 일찍이 1907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과 동시에 성립한 것이다.”(조소앙,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 1940년)
‘제2의 임진왜란’ 갑오왜란을 ‘갑오경장’으로 왜곡
중앙선데이업데이트 2017.08.1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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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기자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 식민지 프레임, 이제는 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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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덕수궁 야경. 경운궁이라 불렸던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다. 일제에 맞선 항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13년 동안 이룩된 많은 근대적 문물이 이곳에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1897년 10월 12일 선포로부터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13년 동안 존재했지만 마치 없었던 것처럼, 혹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폄하되곤 했던 나라가 대한제국이다. 존재감은커녕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은 망해도 싼 나라였을까.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대한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대한제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소위 ‘갑오경장’(1894)이 실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다. 우리 역사의 근대적인 서술 체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94년의 역사적 사건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정리한 것은 일제의 시각이다. 1894년에 벌어진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 백성이 처절하게 희생된 전쟁을 일제는 누락시켰다. 갑오왜란은 ‘은폐의 비밀’을 풀 열쇠다. 1894년 조선이 처한 국가 상황을 갑오경장이 아니라 갑오왜란의 시각으로 봐야 120년 동안 묻혀 있던 역사가 되살아난다.
1894년 8000명의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했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불법 침략이었다. 6월 26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3일 경복궁을 침공해 왕을 생포했다. 이후 전국 각 지방에서 일본군과 조선 백성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의 유생과 의병, 동학군들이 쓴 상소문과 격문을 보면 임진왜란의 재현이었다. 1592년(임진년) 일본의 침략이 임진왜란이라면, 1894년(갑오년) 일본의 침략도 엄연한 ‘갑오왜란’인 것이다.
당시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도 남원에서 1894년 8, 9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국왕 생포 사실을 접하고 이를 임진왜란 같은 침략전쟁으로 인지했다. 동학농민군이 10월에 제2차 봉기를 하며 내세운 구호는 ‘척왜(斥倭)’로 단일화됐다. 반봉건적 폐정 개혁을 구호로 내걸었던 그해 2월의 1차 봉기와 달랐다. 왜침(倭侵)에 대한 항전이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의 불법 상륙에서부터 서울 점령과 경복궁 침범 등 무력행위에 대항해 조선군과 동학군 그리고 전국의 의병이 전개한 모든 전쟁은 갑오왜란에 대한 항전의 범주로 파악돼야 한다.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까지도 일본이 조선침략을 목적으로 일으킨 갑오왜란의 연장선에서 다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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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왜란으로 죽은 조선인 희생자는 청일전쟁에서 죽은 청·일 양측의 수를 합친 것보다 네 배나 더 많았다. 1894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동학농민군이 3만 명이 넘는다. 열악한 의료 조건으로 결국 사망에 이른 전상자(戰傷者)까지 합치면 5만 명에 이르며, 여기에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왕궁 수비대 등 조선군과 일반 의병, 농민을 다 합하면 피살자 수는 20만 명이 넘는다. 많게는 30만~4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418명이었고 병사자(病死者)까지 포함한 총 사망자는 약 2만 명이었다. 청국 사망자는 대만에서의 희생자를 포함해도 약 3만 명이었다.
일본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가 1997년 일본에서 펴낸 저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푸른역사)는 이 분야의 고전이다. 일본군이 1894년 조선을 침략해 경복궁을 포위하고 국왕을 생포하는 전쟁 상황을 치밀하게 고증해냈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의 저자인 와다 하루키도 1894년의 상황을 “조선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이 조선전쟁을 “청일전쟁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와다 하루키 책의 해설문을 쓴 최덕규 박사는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조선전쟁은 한국 강점으로 이어진 동시에 독립을 되찾고자 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을 촉발했다. … 1945년까지 한국과 일본제국은 전쟁 중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최덕규 ‘해제’, 와다 하루키 지음,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제이앤씨, 2011, 85쪽)
“1894년 조선전쟁, 대한제국 독립전쟁 촉발”
우키요에(일본 풍속화)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1894년 조선의 상황을 그린 ‘조선 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朝鮮 京城戰爭 日本兵 大勝利圖)’. 표제나 그림 내용 모두 작가가 조선과의 전쟁으로 당시 상황을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강덕상 일 시가현립대 명예교수가 펴낸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김광열·박순애 옮김, 일조각, 2010)에 실려 있다. [사진 일조각]
당시 일종의 언론 기능을 했던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는 1894년이 한국과 일본 간의 전쟁 시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894년 그려진 우키요에에 ‘조선 경성 전쟁’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이 여러 장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1882년의 임오군란에 대해서도 ‘조선 대전쟁도’라고 규정한 우키요에가 전해진다.(강덕상 편저, 김광열·박순애 옮김,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 일조각, 2010) 우리 역사책만 그 시기를 전쟁이 아닌 개혁의 시기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학과 고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고종이 동학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에게 내린 고종의 거의(擧義) 밀서 등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동학의 2차 봉기는 일본에 맞선 고종과 동학의 연합항전이었음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갑오왜란에서 승리한 일제가 친일 내각을 세워놓고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이 소위 갑오경장이다.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실제 아무것도 이뤄낸 것이 없는 이름뿐인 개혁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슨 대단한 개혁을 한 것처럼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워왔고 또 각종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달달 외우고 있다. ‘갑오경장’이란 명칭에 속았던 것이다. 식민지 프레임의 함정이다.
1894년을 갑오왜란의 전쟁 상황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일제가 왜 왕비 시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까지 저질렀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을미사변’이라는 아무 내용도 없는 표현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갑오왜란으로 궁궐 속에 유폐당한 고종과 왕비가 일제의 군사강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밀어내려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했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다시 돌려주게 되는데, 이 삼국간섭도 고종과 왕비의 대러시아 비밀외교의 성과였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1905년 8월 22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는 왕비 시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주한 공사(미우라)에게 명령을 내려 후자가 친일세력을 이끌고 궁중을 습격한 사건”으로 적어 놓았다.(최덕규 지음, ‘고종 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12년, 104쪽)
일본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들여 위장막을 치며 각종 ‘정치 쇼’를 했지만 고종과 백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왕비 시해사건의 가해자를 왜군으로 못 박는 ‘을미왜변’으로 불러야 ‘갑오왜란’의 연장선상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였음이 이제라도 명확해진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일본을 따라서 을미사변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을미왜변 직후 조선은 국제적으로 ‘망한 나라’로 간주되었다. 왕비까지 시해당한 망국의 상황에서 고종이 항일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망명’이었다. 러시아 황제와의 비밀외교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동안 써온 ‘아관파천’이란 용어에는 국왕을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뜻이 담겼다. ‘파천(播遷)’이라 하면 고종이 도성을 떠나 지방으로 피란 갔다는 얘기인데 고종은 도성의 러시아 공관에 가 있었다. 그것도 숨으러 간 것이 아니라 반격의 싸움을 준비하러 간 것이다. 와다 하루키조차도 이를 “단순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와 갑오왜란에 대한 “최대의 반격”이라고 해석했다(와다 하루키 지음,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39쪽).
고종은 당시 만국공법상 외국이나 다름없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관으로 러시아 황제의 공식 약속을 얻어 ‘망명’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거듭해서 ‘망명(asylum)’이라고 말하고 있다(호머 헐버트 지음, 『The History of Korea』 302쪽). 그러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일본 공사관은 아관망명 이틀 후부터 바로 ‘아관파천’으로 본국에 정보보고를 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관기록』 8권). 일본 공사관 기록, 일본 외무성 문서, 일본 신문들 그리고 친일파들만 ‘아관파천’ 또는 ‘노관(露館)파천’이라 했다.
아관망명 당시 러시아 공사관. 당시 서울 정동 일대에 모여 있던 외국 공관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까지 약 1년간 머물며 항일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현재는 탑 부분만 남아 있다.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대한제국 선포는 갑오왜란 돌파 신의 수
갑오왜란을 역사에서 지워버린 결과가 무엇인가. 을미왜변과 아관망명이 일제에 대한 ‘항쟁’ 관점에서 조명되는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의 경거망동과 자업자득, 고종의 비겁하고 치욕스러운 ‘도망’이라는 개인 행위로 흙칠이 되며 폄하된다.
대한제국 선포는 갑오왜란이라는 전시(戰時) 비상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고종의 ‘신의 한 수’였다. 이를 정상(正常) 국가의 정상적 국정 운영과 비교하면 안 된다. 대한제국 시기 급선무는 당연히 독립전쟁이었다. 대한제국이 근대화 개혁을 많이 이뤄냈지만 그 개혁도 독립전쟁의 다음 순위였다. 대한제국을 평가할 때 제1의 초점은 개혁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투쟁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근대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갈래다. 하나는 지금까지 익숙한 시각이다.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란-청일전쟁-갑오경장-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독립협회·독립신문·만민공동회-러일전쟁-을사보호조약-군대해산-한일합병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시각이다. 노무현 정부 때 근현대사 교과서를 처음 만들면서 ‘좌파 교과서’라고 비판받은 교과서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논란 가운데 만들어진 ‘뉴라이트 국정교과서’ 시안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다. 식민지 프레임이 우리의 좌뇌와 우뇌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120년 동안 또 다른 시각이 폄하됐다. 갑오왜란에 맞선 동학농민전쟁, 을미왜변을 딛고 일어난 대한제국의 항일전쟁이 오히려 반근대적 수구세력으로 채색되는 것이다. 반면 일제의 사주에 의해 움직인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와 독립신문·만민공동회 등은 근대화의 시도였지만 아쉽게도 민비·고종·근왕파·친러 세력의 뒷다리 잡기로 인해 실패한 안타까운 사건들로 정리된다. 이런 틀 속에서 대한제국이 제대로 평가받을 리가 없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소위 ‘을사보호조약-군대해산-한일합병’을 거쳐 멸망하고 마는 허수아비 국가로 인식된다. 역사 서술에서 아예 빼버리거나 서술하더라도 독립협회의 ‘문명 개화’ 운동을 탄압한 친러 반동 수구 전제국가로 간단히 비하되곤 한다.
대한제국이 그렇게 보수반동의 수구정권이고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면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세울 때 굳이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뜻을 밝혔을 이유가 없다. 대한제국의 국호를 계승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했고 헌법에는 ‘구황실 우대’ 조항까지 명시해 놓았다. 그 이유가 뭘까. 우리는 누구의 어떤 눈으로 우리 근대사를 보고 있는가.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역사박물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일조각, 시간여행
더 읽어볼 만한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한영우·효형출판·2001),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 외·푸른역사·2006), 『끝나지 않은 역사』(이태진·태학사· 2017),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상 황태연·청계·2017)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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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전문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참고자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황태연·청계·2017), 『日本軍事史』(후지와라 아키라·서영식 역·제이앤씨·2013), ‘고종 황제와 안중군의 하얼빈 의거’(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2014),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 황제’(이태진·『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지식산업사·2011),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 요약』(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러시아문서 번역집(Ⅳ)』(홍웅호 편역·선인·2011),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홍순권·서울대출판부·1994), 『고종황제와 한말 의병』(오영섭·선인·2007),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한용원·오름·2014),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1940)(조소앙·삼균학회 편·『조소앙선생문집(상)』·횃불사·1979)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