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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신문이 본 대한민국 “세계최초 5대 한국인들의 발명품”

La Corée vue par le journal européen au XIXe siècle « Les cinq premières inventions coréennes au monde »

 

“조선의 민족은 그들의 잠재능력을 발전시켜 구년묵이 유럽을 놀라게 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19세기 유럽신문이 본 대한민국 “세계최초 5대 발명국인 한국인들의 발명품 ”

한국인들의 발명, 1905 일뤼스트라시옹 위롭펜느(ILLUSTRATION EUROPÉENNE)’’ @한불통신 2025-01-08 Paris [한불통신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한불통신2025-01-08) 여기 대한민국의 잠재 능력을 알아본 기사가 있다. 함께 읽어보자.

기사의 제목은 “세계최초 5대 발명국인 한국, 한국인들의 발명품”이다.

19세기 말, 벨기에 브뤼셀에서 발행 했던 신문 ‘일뤼스트라시옹 위롭펜느(ILLUSTRATION EUROPÉENNE)’’에 이  놀라운 기사가 실려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로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1899년 조선을 보고 써내려간 기사란 점을 눈여겨 볼일이다.

내가 이 기사를 접한 때는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성장하기 전이었다. 얼마나 놀라웠는지 나의 처지가 어려운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을 구입했다. 프랑스 파리 고서점에서였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감동을 나누고 싶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한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브뤼셀의 이 신문과 기사를 쓴 기자에게 든 감사의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1899과 1905년, 6년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특집기사로 실린것도 놀랍다.

120년 전 이 신문은 서두에서 “조선의 민족은 그 잠재능력을 발전시켜 구년묵이 유럽을 놀라게 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고 썼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브뤼셀 기자는 한국은 선진 유럽을 앞서갈 수 있다고 예견했다.  1899년은 한국을 알아보는 나라가 없던 시대였다.

시대상황을 따져보자! 1899년 때는 청일전쟁이 막을 내린지 4년이 지난 시기다.  두번째 실린 1905년은 러-일 전쟁이 끝나던 싯점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 될 수 있었던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유럽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여러 신무기가  만들어졌고 무기실험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또한 자존심을 걸고 기술력 자랑과 경쟁에 열을 올렸다. 대량생산과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우리나라 상황은 어땠는가.

청일전쟁을 치룬  조선의 군사력은 바닥을 쳤다. 나아가 외교권마저 강탈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이 기자는  한국을  구년묵이 유럽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국가로 평가했다.

나아가 ‘한국인들의 발명’ 기사에서 보면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구체적인 발명품이야기와  5대 발명품 마다 ‘세계최초’라는 키워드를 등장시켰다.

왜 두 차례나 한국인들의 발명품을 게재했을까?

1899년에는 4대 발명품만 게재되어 있다. 1905년 두 번째 기사에는 삽화를 곁들여 실었고 ‘한글’을 추가해 5대 한국 발명품을 게재했다.

신문은 1904-5년 러일전쟁 발발로 한국이 세계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라고 보았고.  신문은 한국인들이 발명사실을 외부에 알리는데 게으르다는 말도 서슴치않았다.

 

우리나라의 세계최초  5개 발명품을 알고는 있는지 자문해 보자!

신문의 내용을 한땀한땀은 아니더라도 읽어보고 살펴보자.

 

한국인들의 발명, 1905 일뤼스트라시옹 위롭펜느(ILLUSTRATION EUROPÉENNE)’’ @한불통신 2025-01-08 Paris [한불통신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제1호 한국 발명품 <거북선>.

“조선왕은 도망가도 이순신은 거북선으로 일본군함를 물리쳤다.”

“16만 명의 일본군이 중국 침략을 위해 평양에 주둔하면서 10만 명의 지원군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 제독의 계획은 그의 전함을 이용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지원군이 실린  배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뒀다.”

“철갑을 두른 거북선은 600척의 일본군함를 침몰시켰고 일본의 총탄은 거북선의 철갑을 뚫지 못했다.”

또한 이 밖에  거북선을 노 젓던 수병들을  ‘최고의 엘리트’라고 칭하며 치켜세웠다. 적진속 대열로 들어간 거북선은  전속력으로 일본군함을 충돌하고 깨부수고 속히 빠져나왔다면서 아군이 포격할 수 있도록 노를 저어야 했으니 그들의 신속성으로 보아  최상의 육체적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이순신 승전 기념식에 관하여 1905년에도 승전 장소에서 기념식이 행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제 2호 발명품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선조가 발명한 이 무기가 최초란 것을 알고는 있는걸까! 발췌한 기사로 읽어보자.

제 2호 한국 발명품 : 일본의 조총을 능가하는 세계 최초의 박격포와 포탄

“일본인들은 휴대용 화기가 있었다. 한국군은 세계 첫 박격포를 제조하고 첫번째 포탄을 발명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한국인들은 적들로부터 총기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웠고, 대포및 포탄제조로 곧 그들을 능가해버렸다.”

“최초 박격포는 남한산성에 보관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확인해보고 싶다.

“대포는 이동하기 편하게 바퀴가 달렸다”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장약을 담은 자루를 최초 사용했다.

장약가루의 폭발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발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장거리 대포 사용은 장약을 따로 장전하여 사용하고 있다.

최초의 시한포탄 혹은 뇌관장치로 ‘비격진천뢰’ 는  임진왜란을 막아내는 큰 역할을 했다. .

첫 박격포제조, 첫 장약주머니 사용, 첫 시한포탄(뇌관) 비격진천뢰 같은 화공술의 발명은  전쟁시 국가 위기를 막아냈다.

실제 이순신 함대에서 내부 화재 및 폭발 사건은 한 건이 보고되지 않았다. 이는 장약자루 시스템을 사용하여 그 안전성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화포가 세계최초였음을  1899년과 1905년 두차례 밝히고 있다.

 

음성 알파벳이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 한글을 알렸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점을 배경삼아 훑어보자.

제 3호 한국 발명품 : 최초 창제과정을 보여준 한글과  세종 그리고 성삼문

“한국어를 만든 시기와  세종이 창제했다”

“한국어는 소리가 나오는대로 만든 ‘음성알파벳’이다.”

“인류 최초로 음성알파벳이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준게 한글이다.”

“음성알파벳 한국어는 한반도에 사는 독특한 민족의 창의력과 발명 재능을 새롭게 증명해 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신문은 성삼문 한국어학자를 언급하고 있다.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서 아주 깊게 한국어역사를 조사한 모양이다.  만들어진 배경과 의미를 살핀 내용을 보면 말이다.

상삼문이 지은 ‘동국정음’ 은 중국한자 발음의 기록이라며  한국어와 음운을 비교하는데 탁월하다고 보았다.

또한 신문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 한글 창제 뿌리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놀라움이 컸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옛 자료를 인용하여 문창살 모양을 그려 놓았는데 기막힐 정도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때는 1940년이다. 우리마저도 그제서야 한글창제원리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하지만 1905년에 이미  세계최초라며 한글창제의 위대성을  발견했고 알리려 했다.

인류역사 처음으로 음으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음성알파벳’이라는 고유단어도  신문은 처음 지어야만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한국어는 인류사에서 음성언어, 언어 철학, 동시에 아주  과학적인 언어가 아닌가.

1905년 신문은 훈민정음 대신에 한국어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럽에서 한국어를 대중매체에 소개한 것은 이 신문이 최초다.

 

우리는 현수교를  최초 건축한 나라가 우리나라인걸 알고 있었는가. 훌륭하다. 계속 읽어보자.

제 4호 한국 발명품 : 세계 최초 임진강 현수교와 건축술

“북경 명나라장군들은 일본군 추격 중에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다리를 통해서만 건너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그 다리 건설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 거북선을 상상했던 한국인들은 영감을 쏟아냈고 폭 150m의 강물 위에 최초 현수교를 건설했다”

“한국인들의  아이디어가 새로웠다. 이를 위해서 전국에 분포된 칡을 모으기 위해 특사가 파견되었다. 그렇게 채집한  칡넝쿨을  꼬아서  만든 튼튼한 케이블 80미터는 강 양측에   연결되었고 최초의 현수교로 거듭났다. 12만 명의 병사들과 장비들은 다리를 건널수 있었고  현수교 덕에 퇴각하는 히데요시의 군대를 계속 괴롭혔다”

“첫 현수교는 보트를 이용했다. 강의 한쪽에서 다른 한 쪽을  평행으로 잇는 여덟 개의 케이블로 연결했다. 그다음 나무와 가지로 된 가로대를 잇는 케이블을 수직으로 놓고, 그 위에 진흙 층과 자갈층을 차례로 쌓아 올렸다. 최초의 현수교는 이렇게 건설되었다! 위기앞에 강한 한국인임을 입증했다”

서애 유성룡이 작성한 징비록에서 임진강에 다리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 다리가 세계최초 교각이 없는 현수교라는 것은 1905년  이 신문에 의해서 세상에 밝혀진다.

위기마다 민초와 의병 혹은 의사들이 나라를 구했듯이 임진강에 최초로 현수교를 건설한 것도 전국의 민초들이 칙을 모아 다리를 건설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데 큰  의미를 둬야한다.

한국 기업이 수주하여 2022년 3월 18일 개통한 세상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튀르키예 <차나칼레>, 한국과  현수교 스토리는  우연의 일치일까.  1905년 브뤼셀신문은 한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 현수교 건설의 주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의 발명품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외국 언론에 비친 시간으로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제 5호 한국 발명품: 세계 최초 금속활자와 인쇄술

“불교 승려들의 지배 아래에서 교육은 의식적인 형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새로운 왕가(조선)의 통치 아래에서 유교교육은 새로운 교육체제를 갖추게 된다.”

“약 1세기 전에 발견된 인쇄술 덕분에 고전 학문은 눈부신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한국에서 탄생한 것은 1406년 태종황제 치하에서였다.

한국인들은 이 방법(목판인쇄)을 대체하기 위해 금속 활자를 사용한 인쇄 시스템을 처음 고안했다.”

“첫 글씨형태(fonte)는 1406년에 나왔고 임진왜란 전까지 2개의 다른 글씨 형태가 있었다”

“하루에 1600쪽을 인쇄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벨기에는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드물게 금속활자 인쇄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최초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  이 신문의 기사는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한국문화가 확산되면서 한국어가 세계적으로 인기 상승을 타고 있는 추세다. 또 한국어로 씌여진 문학이 번역을 통해 노벨문학상까지 한국인에게 수여되었다.

‘한국의 발명품’을 일찍이 인식하고 자세한 숫자 및 년도를 보도한 이들의 시각과 정보력에 다시한번  놀랐다.

우리도 인식못했던 우리네 발명품들을  먼저 인정하고 최초라고 언급하며 세상에 알리려 했다. 아마도 이 신문은 세계최초 한국인들의 발명을 언급한 신문으로 사료된다.

이 신문이 여러번에 걸쳐 꾸짖고 강조하는 게 있다.

“인류문명에 혜택을 준 발명품들을 알리지 않은 한국 후손들은 게으르고 기절상태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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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통신 오영교 paris50ky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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