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철주불대사 이임편지와 1945년 해방전에 주불대사가 가진 역사
Lettre d’adieu de l’ambassadeur en France Choi jai-chul et l’histoire des ambassadeurs en France avant la libération en 1945
최재철주불대사의 이임사 편지가 메일로 왔다.
한불통신2024-10-28) 얼마전부터 임기를 마치고 떠난다는 소릴 들어섰지만 편지를 받으니 기정사실로 받아 들인다.
그의 이임 인사 편지를 읽었다.
최대사는 파리와 인연이 아주 많다.
아마 전생에 파리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정도다.
주불대사로 임명받기 전에 국제박람회사무국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 (BIE) 의장으로 선출되어 국제박람회 총회와 박람회국가를선출에 있어 중심에 있었다.
10여년의 BIE사무국 의장직은 부산박람회 유치에 큰 변수로 보았고 주프랑스특명전권대사로 임명을 받았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기자는 2030 박람회 결정을 짓는 그 시간에 현장에 있었다.
사우디인들의 승리의 함성를 듣고 일찍히 발걸음을 뒤로 돌렸지만 예견했던 치수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언급할 가치와 기운마져도 없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고 헛되게 느꼈다.
3만명의 교민들은 박람회를 위해 정부 유치노력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매번 파리에서 개최되는 행사에서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역차별이다.
최대사의 이임편지에서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언급이 현장을 지켜보아서 그랬는지 누구보다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제는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챙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파리는 가진 지정학적 역사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조선정부의 첫 전권공사로 파리에 부임한 이범진, 임시정부 외교부 서기장 김규식과 황기환, 특임대표로 서영해가 대한민국이전부터 대사관 역할을 했다.
이범진 전권공사는 1900년도 파리만국박람회 조선정부대표로 파리에 부임하여 첫 대사관저를 만들었다.
1919년 미군장교였던 황기환은 우사 김규식 후임으로 파리에 초청받는다. 그는 서기장으로 취임하여 프랑스 정부를 상대했으며 첫 이민 35명을 정착하게 만들었다. 이는 상해임시정부의 특명과 일제로부터 벗어나게 만든 파리임정으로서 대사관 첫 역할이다.
서영해는 상해임정으로부터 프랑스 및 유럽대표로 위임을 받았다. 1932년 윤봉길 홍커우 공원 폭탄의거로 인해 프랑스 경찰서에 체포된 한인들이 있었다. 상해임정 특명이 서영해로 전보로 전달되었고 그는 불외교부를 상대로 석방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11명의 한인을 석방시킨다. 또 드골임시정부와도 긴밀한 협조를 맺었고 처음으로 한국임시정부자격으로 제네바 국제연맹에서 발언권을 가졌다. 독일 나치치하에서 반 나치활동을 하였다.
한국파리대사관은 역사에서 보듯이 교민들과 관계가 특별한 곳이다. 교민들은 독립활동지원금을 보냈으며 자연재해로 힘들어 할때도 위로금을 보냈다. 각종 위기나 올림픽등 여러 행사에서도 교민들은 한국과 함께했다.
최대사는 1851년 한-불 첫 외교적 만남을 2023년 회고하여 역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그가 가진 역사적 소명의식 및 외교사를 기록할 리더로 자리할 것으로 보인다.
최재철대사처럼 평생을 파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외교관활동을 해온 인사는 드물지만 그 후배들이 계속나올 것으로 보인다.
대사라는 이름은 그 명예와 함께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마치 그 역사가 그의 흔적을 영원히 간진 하듯이 말이다.
최재철주프랑스대사 이임사
끝)
한불통신 paris50kyo@gmail.com
#최재철주불대사이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