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미삭 마누치안Missak Manouchian 외국인 최초로 팡테옹 안장
레지스탕스 미삭 마누치안Missak Manouchian 외국인 최초로 팡테옹 안장
나치 독일 점령한 프랑스서 무장 투쟁…1944년 2월 21일 총살
佛정부 “프랑스 위해 흘린 피는 모두 같은 색”
한불통신-ACPP 2024-02-21 ) 1940년대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처형당한 이민자 레지스탕스 미삭 마누치안이 공산주의자이자 외국인으로는 처음 프랑스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21일(현지시간) 오후 6시30분 마누치안의 관을 팡테옹으로 이장하는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프랑스 정부가 발표했다.
1944년 2월 20일은 지금으로부터 마누치안이 독일군에 총살당한 지 정확히 80년 되는 날이다.
1906년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기독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아 레바논의 보육원에서 자란 뒤 1925년 프랑스로 이주, 시트로엥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공산주의 모임을 자주 갔던 그는 극우파의 부상에 분노해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한다.
이때 같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대학살의 생존자였던 미래의 아내 멜리네를 만난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마누치안은 프랑스 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동원 해제된 이후엔 무장 투쟁에 참여하며 반나치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가 대표를 맡은 외국인 레지스탕스 모임 ‘마누치안 그룹’은 1943년 9월 당시 나치 고위급 장군이던 율리우스 리터를 사살하기도 했다.
이 그룹엔 주로 유대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아르메니아인이 소속돼 있었다.
나치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던 그와 그의 동료 23명은 그해 11월16일 끝내 체포돼 독일군에 넘겨졌고 이듬해 2월 21일 파리 서쪽 외곽인 몽 발레리앙에서 처형당했다.
그가 죽기 전 아내 멜리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도 유명하다.
그는 편지에서 “나는 승리와 목표가 눈앞에 있는 순간 죽는다. 살아남아서 내일의 자유와 평화의 달콤함을 맛볼 사람들에게 행운을 빈다”고 적었다.
또 “나는 프랑스 국민과 모든 자유 투사가 우리의 기억을 존엄하게 기릴 것이라 확신한다”고 적었다.
아내에게는 “당신이 항상 원했던 대로 아이를 가졌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과 결혼하길 간청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전 두 차례 프랑스 국적 취득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외국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팡테옹 안장을 결정한 프랑스 정부는 “마누치안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구현했고 공화국을 수호했다”며 “프랑스를 위해 흘린 피는 모두에게 같은 색”이라고 공을 인정했다.
21일 기념식에서는 그의 정체성과 유사한 외인부대 군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한다.
아내 멜리네도 함께 안장되며 그와 함께 싸우다 처형당한 동지들의 이름도 묘비에 새겨진다.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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