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황기환선생 100년만에 귀국
M. Sunshine (Drama KBS) Hwang Ki-hwan rentre chez lui après 100 ans
‘4월 독립운동가’
이 희경, 나 용균, 황 기환 선생
국가보훈처는 ‘미스터 션샤인’ 황기환 선생과 이희경·나용균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황기환 선생은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서 활동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이듬해 11월 종전 후 김규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을 맡았다.
유럽 언론과 각국 대표·저명인사에 송부하기 위해 만든 회람문 ‘통신전’ 를 발행해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미국으로 복귀한 후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침략과 통치 실상을 알렸고 그해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보고했다.
선생은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돼 프랑스와 영국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해 10월 영국의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다.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 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무스만스크에 노동자로 체류하고 있던 한인 200명을 유럽으로 피난신청자 중 35명을 프랑스로 정식 이민자로 오게했다.
프랑스 외교부, 노동부 접촉을 통해 한인 35명을 승인을 받아 스위프시에 노동자로 정착하게 되었다.
1920년 1월에는 파리에서 1919년 3.1운동 한국에서 촬영된 영상을 관람했다는 프랑스 경찰 보고서도 발견되기도 했다.
1921년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 수상회의에서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일본대사에게도 보냈다.
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했으며, ‘일영동맹(日英同盟) 반대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이듬해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선생은 이후 뉴욕과 런던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선생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보훈처는 황기환 선생 유해를 순국 100년이 되는 다음 달 국립묘지로 봉환할 예정이다.
이희경 선생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일리노이 대학 의학전문과에서 수학하며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임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16년 하와이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의 의료체계를 마련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해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다.
선생은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계 확립에 노력했으며 간호원 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했다.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모은 의연금을 상하이 임시정부 본부로 송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 동양시찰단’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본의 잔학성을 알렸다. 또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펼쳤다.
1921년 안공근과 함께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러시아의 독립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기도 했다.
선생은 1937년 국내로 귀국해 호흡기 전문의로 일하다 1941년 별세했다.
나용균 선생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최팔용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 1919년 7월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22년 러시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1922년 2월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관한 사항을 준비하는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김철 등과 함께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생은 광복 이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1984년 서거했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이희경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나용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0)을, 황기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5)을 각각 추서했다.
출처: 한불통신,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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